본문 바로가기

내 얘기

지나간 20대를 돌아보며 (30대의 회고록)

반응형


나는 게으르다. 단지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며 살아갈 뿐이다.

오늘 문득 '20대의 회고록을 30대가 되는 날 즈음에 적어보면 어떨까? '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내 스스로의 게으름을 알기에 미리미리 적어두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아서 미리 적게 되었다.

사진과 동영상.. 모두 좋은 기록 수단 일테지만.. 지나간 순간의 생각을 글로 기록하는 것도 좋은 방법 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 되었다. 철 없는 10대의 시절을 글로 적기에는 챙피 하겠지만.. 20대에는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기 시작 했기도 하고..(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2018년 안에 완성을 목표로 작성중입니다. 즉.. 2019년 전에는 언제나 수정될 여지가 있습니다.)

2009년



    2009년 20살이 되던 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마도 인생의 수 많은 실패 중.. 가장 체감이 큰 실패를 처음 느낀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때 까지만해도 대부분의 사람이 성실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만 성공이라 생각했다.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시기에는 지금보다 더 사람들이 사고가 유연하지 못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고 (누가 흥미가 있으련만) 그렇다고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머리도 뭐 그닥 좋지 않았지(남들과 비슷한.. 수준)

    그러니 당연히도 갈만한 대학이 없었다. 그러다가 폴리텍 대학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당시에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께서는 점수에 맞게 세명대,목원대 라는 난생 처음 듣는 대학교를 찝어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도 컴퓨터를 좋아해서 담당 선생님께서도 큰 생각 없이 컴퓨터 공학쪽을 찝어주셨던거 같다. 이 당시에는 이 대학에 가면 내 인생이 크게 망가질줄만 알았지.(해당 대학교 절대아님. 지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정도?) 결과적으로 성남에 있는 폴리텍 대학에 시스템 제어장비 학과라는 곳에 입학하게 되었다.(현재는 스마트제어과 라던가? 이름이 바꼈다고 한다.)

    공부도 공부지만 살아가면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이때 처음으로 겪고나니 무언가 무서움이 느껴졌다. (재밌게도 이 글을 쓰는 2018년에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지만 ㅋㅋ)

    그렇게 이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어 나름대로 내 인생에서 짧은 순간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순간으로 기록 될 것이다. 오래가지도 않았지만 여자친구라는 것도 있었고.. 학점 & 성적도 뒤보다는 앞에서 찾기 쉬운 등수까지 올려본 적도 이때가 처음 일테지. 그래 장학금도 받아본 기억도 난다. 간간히 일일 알바도 했던 것 같다. 학교 자체가 기술대학(2년제 전문대학) 이다보니.. 수업이 고등학교 정규수업정도로 많았다.
    고로 4년제 대학교 친구들의 즐거운 로망같은 건 거의 하나도 없다 싶히하다..(요즘은 취업이 치열해서 1학년때만 살짝 노는걸로.. 얼핏 들었다.) 이때는 폰테크라는 것이 정말 가능해서.. 뽐뿌에서 휴대폰을 개통해서 되파는 것으로도 교통비와 식비정도는 해결이 가능했다. (나는 참고로 고등학교 이후로 현재까지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요즘은 근근히 내가 드리고 있지)

    그렇게 성남 <-> 서울을 1시간 반씩 통학하며 다녔다. 7시 반에 집에 나와서 9시에 수업을 듣고 18시에 집에 가고.. 이 생활로 1년을 지냈던 해이다. 심심해서 디아블로2를 다시 시작했고.. 매크로를 돌리며 살았다 (집에오면 아이템 까는 재미가 ㄷㄷ)

    그리고 이 당시에 우리나라 IT는 정말 어썸해서.. 나는 아르고폰(클릭 http://reviewforum.tistory.com/113)이라는 걸 썼다. 이 폰으로 말하자면 기기값이 2400원이었고 (??) 1달에 10기가? 인가를 쓴 걸로 기억난다. 피쳐폰의 플랫폼인 WIPI용 브라우저를 이용 했다. 이 당시에는 모바일 웹 페이지라는 개념자체도 없었으므로.. PC를 위해 작성된 웹 페이지를.. 그대로 휴대폰에서 렌더링해서 봤던 시기이다..
    확대 & 축소를 더블 터치로 일일이 했던 시기이고... 10기가 지만. 지금보다 데이터를 훨신 더 많이 소비 할 수 밖에 없던 시기이다.(페이지가 모바일에 전혀 최적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20대 친구들은 상상도 못할ㅋㅋ)
    이때 클리앙이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뽐뿌와 클리앙이 서로 정보를 조금씩 상생하던.. 시기)  클리앙은 이 당시에도 웹 표준을 잘 지키는 편이라 아르고폰으로 쉽게 뉴스를 보고 눈팅정도가 가능했다. (모바일 웹은 없었지만.. 피쳐폰 브라우저로도 모든 걸 다 할 수 있었다. activeX, Flash를 그 당시에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새로운 소식에는 '최완기'라는 분이 해외뉴스를 번역해서 올려주셨고 IT전문가들이 댓글로 건설적인 토론을 많이 나눠서.. 나같은 뉴비는 그 토론으로 수 많은 지식을 쌓았다.
    (추억이지만 이 분은 수 많은 해외 사이트 번역글을 무 보수로 올리며 클리앙에서 수년간 활동 했고.. 현재는 아이티클 http://itcle.com 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시며 클리앙을 떠났다.)


    이야기가 중간으로 세어 나갔는데.. 그것도 성남<->서울을 오가는 지하철에서.. 현재 가진 지식도 대부분 이당시에 지하철에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이때 아이팟 터치 1세대를 구해서 썼었고 대략 1년정도를 쓰고 겨울에 버스에서 잃어버렸다 ㅠㅠ(아마 내 인생에 가장 큰 금액의 분실..)

    그리고 이 해에 아이폰 3G 미국에서 발표 되었고.. 클리앙을 통해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 당시 수 많은 규제와 법, 갈라파고스 때문에 나온지 6개월 가량 지난 아이폰 3GS가 한국에 2009년 11월 28일에 KT 독점으로 정식 출시 되었다.

    나는 이 당시 커플폰을 써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아이폰을 사지 못했고..(ㅠ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람과 헤어지면서 2010년에 1월 언저리 즈음에 아이폰을 구매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의 아이폰3GS 출시 과정은 매우 긴데. 이것은 위키피디아에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C%95%84%EC%9D%B4%ED%8F%B0_%EC%B6%9C%EC%8B%9C)

    그리고 이때 은행사거리에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처음으로 마시고 커피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때는 스타벅스가 라마조끄라는 수동 머신을 사용해서 커피를 판매 했었는데.. 지금의 마스트레나(자동머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맛과 퀄리티를 자랑 했었다. 물론 당시 스타벅스 파트너들의 친절도 엄청났고.. 이 시기에 된장녀라던가 하는게 확 이슈로 떠 올라서 스타벅스 + 맥북은 된장질의 상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스타벅스는 타사 대비 정말 커피 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그 가격에 걸맞는 퀄리티를 뽑아 줬었다. 또한 이 시절에는 랩탑이라는게 비싼 물건이었고 맥북은 다른 랩탑보다 월등히 비쌌지만 확실히 사용성이 좋았다. (그리운 타이거, 레퍼드 시절..) `



2010년

    이때도 물론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나는 이때 IT에 매우 밝아있는(관심이 많은?) 상태였고.. 아이폰을 쓰지 않았음에도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사용 했었다. (그리고 군입대할때 탈퇴하고 최근에 다시가입 ㄷㄷ)   이걸 적는 이유는 2010년 1월 11일에 아이폰3GS 화이트 16기가를 구입했고 트위터를 통해 노원구에 사는 트윗리안(이당시에는 이런것도 있었다 ㅋㅋㅋ)들과 친해져서 자주 번개를 다니고 놀았다. 21살인데 이 당시 번개에 나왔던 사람들은 아마 25~26살 정도 형 누나들이었다. 이때만 해도 이 사람들이 참 어른인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그들이나 나나 애기들이었다 ㅋㅋㅋ

    요즘은 세상이 흉흉해서 번개라는걸 이해도 할수 없고.. 그런게 가능하냐? 라고 하겠지만.. 이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세상은 따뜻하고 지금처럼 팍팍하진 않았다. 요새는 참 너무 날들이 서있는 분위기라 이런 훈훈한 맛으로 사는 세상은 못 되는 것 같아 아쉽다.

    이 당시에 중계동 은행사거리 스타벅스에서 알바를 하던 어떤 누나를 트위터 번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 차와 어떤? 오해로 잘 이루어 지진 못했지만 그 당시에도.. 이 글을 쓰는 현재에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내 마음 속 첫 사랑은 아마도 이분이 제일 먼저 떠 오른다. 여튼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한채 1학기(반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한뒤 10월 26일에 입대를 한다.
    2년제 대학교였기 때문에.. 전체 4학기중 3학기를 마치고.. 기술대학 특성상 마지막 4학기는 대부분 취업을 나가고.. 남은 인원들이 조별 프로젝트를 하는 형식이라.. 사실상 졸업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이다.

   


2011년


어썸한 군생활을 하게 된다. 지금은 없어진 의정부의 306보충대를 통해 17사단 보병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으나, 고등학교 시절 앙-숙으로 지내던 김모씨가 내무반 맞선임급으로 되게 되면서 군생활이 상당히 어려워지게 된다. 이 부대는 GP, GOP처럼 근무를 서는 방호부대 였는데 방호지역을 순회할때마다 1달에 1박 휴가를 받는 부대였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근무 여건을 빼면 최고의 부대였으나......

생활하기 어려움을 이유로 나는 전출을 가게 된다. (물론 전출의 사유는 다른 핑계거리를 대서 나왔지만) 머 추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 부대의 대대장이 바뀌면서 휴가는 사라지고 엄청 빡세졌다는 후문을 전출간 부대에서 듣게 되었다.

여튼 전출간 부대에서는 통신병 보직을 받게 되었고.. 지하철역 산곡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대였다. 그런 만큼 군생활은 퀘적하기 그지 않을 정도로 지금 생각해보면 널널했는데.. 다만 부사관과 장교들은 출퇴근을 하면서.. 이들은 그냥 군복만 입은 당나라 군인이었던 것 같다.  최악인건 이렇게 근무여건이 좋은 부대인 만큼 정말 휴가는 말도 안될정도로 빡빡하게 안줬던 부대다.

휴가가 많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가지 인데.. 17사단 자체가 워낙 휴가가 많아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서 휴대를 줄였다라는 얘기 (사실 뜬소문이고 개소리 같은 얘기다)  그리고 부대가 대대급보다 작은 대급이어서 휴가가 많지 않다는 얘기


2012년


8월 28일 전역을 하였다. 원래는 8월 1일? 2일? 전역인데 두번이나 영창을 가게 되었다. 한번은 싸지방이 정말 허접한 보안 프로그램으로 돌아가서 사양대비 정말 느렸는데. 이게 짜증나서 보안 프로그램을 강제로 꺼버리면 싸지방이 요금 과금이 되지 않고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어떤 녀석이 간부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영창을 가게 되었다. 지금 들어보면 황당하지만.. 뭐 내가 잘못한 것이기도 하고. 이걸 사용하면 사용자의 로그 수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안에 민감한 군부대에서 큰 문제로 확대 해석 한 것..

두번째 영창은 휴대폰 사용이 발각되었다. 누가 알아내고 간부에게 보고하여 걸렸는데.. 누가 알아낸건지는 알지 못한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음. 여튼 이것도 내가 잘못한거니 깔끔하게 다녀옴. 지긋지긋한 영창생활 ㅋㅋㅋ 깜빵생활 간접체험이었다.

그리고 9월1일부터 쉴세없이 바로 복학하였고 졸업했다. 참고로 졸업전에 일진 전기라는 곳에 주간조 생산직으로 취업이 됫었다. 나는 1학년때 장학금도 받았고 학점도 이 학교내에서는 나름대로 준수한편 이어서 (그래봤자 3.66) 교수들이 추천 비슷하게 취업 연계를 해줘서 쉽게 취업을 했으나 1달도 다녀보지 않고 바로 퇴사를 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패기도 있었고.. 전역하고 뭔가 더 내가 잘 할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일하고 싶은 맘도 컸고.. 도피는 아니었지만 1년정도는 다녀보고 결정하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가끔 남을때가 있다. (아마 그래도 오래 다니진 못했을거 같긴하다..)


2013년


 첫 직장을 한달만에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 생활 하는 것에 아쉬움이 컸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사는 재미를 찾았다면 좋았겠지만.. 이 당시에는 수원 병점역에 위치한 그 회사 생활이 팍팍하고 즐겁지 않아서 그만두고 서울에서 스타벅스에서 알바를 시작 했다.

 지금은 없어진 명동성당점 스타벅스에서 면접을 보고 1월 4일부터 다녔다. 아마 2주 인가 3주인가 본사 교육을 받고.. 매장 일을 시작 했다.. 중간에 10개월 정도를 다니다가 대학 전공인 기계 관련 회사를 다시 다니기 위해 퇴사를 했다.
그래서 2014년에는 별다른 것은 없다. 다만 중간에 일을 그만두고 두달정도 취직을 생각했으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고.. 크게 열심히 한 기억이 없는 것 보니.. 아마 취직할 생각이 없었던게 아닌가 싶다. (20대의 2년이 그냥 날아가버린 느낌;;)


2014년

상반기


1년 정도를 일하고 그만 둔 뒤 여름정도 부터 다시 스타벅스 일을  시작 하게 되 었다. 마지막에는 이곳도 현재는 없어진.. 명동의 SK T타워 빌딩의 입점 매장에서 일을 했었는데. 일도 편하고 사람들도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이런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다는 머피의 법칙을 이때 쯤 알 게 되었다.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시던 점장님이 홀연히 근처의 신규매장으로 인사 이동 하게 되었고.. 다른 점장님으로 교체 되면서 조금 일이 재미 없어 졌다. 이때 명동역 앞의 스타벅스가 생겼었고.. 그쪽으로 가셨다. 새로 오신분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닥 유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때 괜찮다고 생각하는 동갑의 매니저가 있었는데.. 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 당시 다이어트와 운동을 하여.. 몸무게를 70kg까지 뺏었던 기억이 있다ㅋㅋㅋ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해서 가능했고.. 다시 다이어트를 해야지 라는 생각을 4년째 하고 있다 ㅋㅋㅋ
  여튼 그러다가 추석연휴 전날 깨진 유리병에 손을 크게 다치게 되었다. 보통은 수술할 정도로 크게 다친적이 처음 이었는데.. 연휴까지 껴서 정말 슬픈 추석 연휴 였다. 2주 뒤에 퇴원을 했고 재활까지 2달정도 병원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업무시간에 다친것 이라 전액 상해처리가 됫었는데.. 나는 2주 뒤에 퇴사를 하기로 되어 있어서.. 연휴후 2주동안은 휴무와 휴가 처리가 되어 퇴직금이 엄청 적었던 기억이 난다.. (100만원이 넘었어야 했는데 100만원이 조금 안되는 금액까지 내려갔다. 입원기간이 전부 휴가 처리 되었기 때문)

이때 매장 내에선 꽤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아예 퇴사처리되지 않은 사람이 1명의 인원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 몫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채워야 했을 것이다. 여튼 이 매장도 장사가 잘 됫었는데.. 어른들의 사정으로 폐점된 것 같다. (사실 전혀 폐점될 이유가 없는 매장이었다. 장사도 잘됫고.. 폐기율도 제로에 수렴하고.. 단가 높은 상품이 순풍순풍 잘팔리는 그런 매장.. 일하는 사람들도 평일만 일하고)

 그렇게 5월까지 쉬다가 6월쯤에 다시 스타벅스로 돌아가게 된다. (배운게 도둑질이라는 말을 누가 만든건지 후..)



하반기


그렇게 5월말인지 6월인지 부터 신세계 강남 5층점에 일하게 되었다. 내가 퇴사할때 5층이 폐쇄되고 9층점으로 바뀌었다. 아마 현재까지도 9층점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쌩 초보 인줄 알고 뽑았는데.. 1년이나 일한 경력자 여서  같이 일한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었던 것 같다. 사회성이 그렇게 좋지 않은 나였는데. 이때 대부분의 매장 사람들과 엄청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내가 잘한것 보단.. 이미 1년 일한 사람이 들어와서 이리저리 세세하게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잘했으니.. 어느 회사에서도 이런 사람은 이쁨을 받으리라 생각된다.

아.. 생각해보니 이때도 조금은 마음이 안맞았던 사람이 한명.. 아니 두명쯤 있었던 것 같다. 한명은 워낙에 성격이 강한 분이셔서 일할때 마찰이 있었다. 근데 또 업무시간 끝나면 그럭저럭 잘 지냈던거 같기도.. 

다른 한명은 누가 봐도 일을 그렇게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매장 점장님도 이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고.. 아마 같이 일하면서 나도 무척 답답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약간 다투면서 내가 이분을 울렸던 적도 있다 (-_-).. 욕하고 못살게 군건 아니었고.. 조금 답답해서 틱틱 거렸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쌓인게 감정이 폭발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2013년의 나도 일을 엄청 못했었고.. 점장님이 퇴사 권유를 했을정도로 폐급이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고 뒤쳐지는 사람을 잘 케어 해주지 못한 내 잘못이 엄청 컸으리라 생각된다. 군대로 치면 '분대장' 같은 역할 이었는데. 오히려 잘 안다고 악동처럼 굴었던게 그분과는 캐미를 떨어트렸던 원인인듯 하다. 오랜 뒤의 일이지만 IT업계에서도 비슷한 일 때문에 인턴에서 정직원 전환이 되지 못하기도 한 것 같다. 사회는 의외로 능력순이 아니라.. 사회성과 화합.. 그리고 무던하게.. 묻어가는 삶을 사는게 오래 버티는 것 같다.

사회에서는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닌..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것' 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게 이 얘기 일 것이다.. 글쎄 현재의 한국 사회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능력 사회고 취업 대란이라지만 결국 사회에서 어떤 집단.. 회사의 일원이 된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내가 20대였던 10년전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이건 크게 변화지 않는 것 같다. 점점 바뀌는 추세 인듯도.. 하지만.


2015년

나름대로 재밌게 살면서도 결국에는 이곳을 떠나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일은 단순하고 쉽게 다른 사람에 의해 내가 대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회사 분위기가 근로자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고 이는 받는 보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처음 부터 그러진 않았지만 서서히 스타벅스는 서비스의 퀄리티나 근로자의 즐거움은 생각하지 않고.. 이윤을 최 우선시 하는 회사가 되어 버렸다.

 스타벅스를 직장으로 삼는 사람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단순한 일을 하며 산다는건 사람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든다.  나는 굉장히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걸 이때 쯤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어떤 직장에서 일 하더래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 이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는 굉장히 위험한 함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번쯤은 내 삶을 되 돌아보고 조금은 도전을 할 수 있는 시기가 20대 시기라는 생각이 컸다.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내가 하는 일에 즐거움을 최 우선시 하는 사람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날 단순하고 게으르게 만들며 내 시야(Scope)를 좁힌다면.. 그 일은 많은 돈을 벌어도 하면 안되는 일이라는 주관이 이때쯤 생겼다.

여하튼 이런 여러가지 이유를 가지고 나는 최종적으로 스타벅스라는 회사와 근로자가 아닌 손님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은 동네 스타벅스와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서 대부분 작성되고 수정 되었다. ㅎㅎ

나는 이 매장을 다니면서 비밀 연애라는 걸 했었고 ㅋㅋㅋㅋ 여유롭진 않지만 근근히 입에 풀칠하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연애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워라벨을 이 당시에 누리며 살았다.(물론 워라벨의 단어에 숨은 여유는 별로 없었다.) 직찍 직캠 취미도 이때 함께 하면서 사진을 자연스럽게 필드에서 배웠다. 가수 윤하의 직찍 팀 블로그에서 한 유명한(??) 사람이었고.. 즐거웠지만 한켠에는 불안정한 미래를 개선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피해 다녔던 것 같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내 커리어에 직접적으로 영양가가 되는 일은 하나 도 없는 한해 이다.


2016년


이 해에는 많은 것들이 정리 된 해였고..지금까지 쭉 혼자였으며 현재도 그렇다. 그리고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스타벅스를 떠난 건 이때 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정확히는 2015년 연말에 퇴사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헤어졌다. (정확히는 신세계 강남 5층 스타벅스가 9층으로 이전하는 것까지 도와주면서 퇴사를 하게 되었다.)

위에도 적었지만 퇴사의 이유는.. 이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헤어지고 퇴사한건 아니었다. 이별보다 퇴사가 먼저 였고.. 퇴사 하자마자 프로그래밍 공부를 한 것 또한 아니었다. 이런 저런 회사를 또 알아 봤었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이 사람과 연락이 끊어졌다. 물론 편안하고 익숙한 사이가 되어버려서 서로 뜸 해졌다. 매우 자연스럽게..

실제로 말한 적은 없지만 조금씩 이사람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러가지 있었는데.

가장 주요 했던건 이분이 나보다 연상 이었고.. 슬슬 결혼에 대해 생각 할 시기 였었다. 그럼에도 나를 1년 가령 만났었고. 나는 완곡하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지금보다 훨신 더) 그리고 이분이 신규 매장으로 발령을 받아 서울에서 아주 멀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방 발령 후에도 한동안은 연락을 하고 만나며 지냈었는데.. 이때 나는 이미 일을 그만뒀었고..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벌이가 불가능 했다..

그 사람의 지방 발령 + 나의 여러가지 변화와 불안정한 시기(직업과 진로) + 서로 지나치게 바빠지며 상대방을 신경쓰지 못하는 상황...이 많은 복합적인 이유가 맞물린 것이 그 사람과의 이별 사유라고 나는 지금에서야 생각 해본다.

그 사이 나는 구직에 성공하여 삼성전자 본사의 협력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반도체 관련된 회사였고. 3조 2교대 근무를 했었다. 신입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1달만에 내 근무지를 회사에서 바꿔 버렸는데. 바뀐 근무지의 선임 과 사이가 영 좋지 않았다. 정 반대 성향이 사람과 트러블이 좀 심해졌고.. 그것이 이 사람과 나의 문제 이기도 하지만.. 이 회사의 업무가 나와 마지 않다고도 생각되어..  눈 내리는 연말에 이 회사를 그만 두게 었다. 

상반기 + IT 국비지원 교육에 대하여

잦은 퇴사로 인해 부모님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회사를 일하면서 결국에는 퇴사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다방면으로 퇴사후 에 할일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실 퇴사를 하지 않고 프로그래밍 공부를 병행하며 다니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야간 혹은 주말에만 프로그래밍 교육을 하는 코스가 거의 없었다. (현재도 무료 강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느 순간 프로그래밍이 미래다 라는 식으로 조기 교육에 프로그래밍 열풍이 조금 불어서.. 여러 과정들이 생긴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요즘은 실력좋은 프로그래머들이 후배 양성을 위해 돈을 받지만 대부분은 돌려주는.. (No Show 방지를 위해 돈을 받았다가 페이백 해주는) 형태의 오프라인 교육이 정말 많이 생겼다. 내가 못찾은 건진 몰라도.. 이때는 그런건 없었다. 그래서 퇴사를 했고.. KITRI에 자바 관련 국비 지원 교육을 받았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여전히 나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교육 동기들 대부분이 컴퓨터 공학이거나 관련 전공이어서.. 나름대로 어렵지 않게 취업에 성공 하고.. 대부분 1년차의 경력자가 되었다. 나는 인턴을 전전하고 아직 제대로 자리를 못잡진 못하고 있다.

KITRI의 자바 교육 과정은 3월 쯤부터 8월말? 9월정도까지 교육을 받았다. SQL, Java, Mybatis, Spring Frame work, Android를 거의 1.5달에 하나씩 배우고 안드로이드는 3주정도의 기간이 배정된 교육 과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육 수준은 초보자에게 적당하다. 그말은 초보자인 누가 들어도 괜찮지만.. 스스로 부단히 공부하고 이해하고 의욕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강사의 수준과 강의의 퀄리티를 따지기전에 배우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다면 배우는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원으로 부터 취업 의뢰 라던가.. 취업 연계를 크게 기대하고 이 교육을 들으려 한다면.. 절대로 청강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일단 그들이 권유 하는 회사가 좋다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우선 교육원에서는 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기대는 하지마라. 적극적으로 찾아먹어야 하며 이력서, 포트폴리오 작성.. 그 모든 것은 스스로 하길 바란다. 학원을 다니면서 아예 포폴을 만들길 바란다. 파트마다 작은 프로젝트를 분명히 하게 될텐데.. 꼭 결과물이 남는 포트폴리오를 진행하길 바란다. 무엇을 해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굉장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나름대로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현업에선 완성이라는 건 없다. 언제나 새로운 기술 추가가 생기고.. 트렌드가 바뀌고 버전이 올라가고.. 이슈가 생긴다.


하반기

나는 이 교육에서 코딩과 디버깅에  큰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든 배운 내용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5명으로 시작한 교육이.. 나중에는 15명 내외 나머지는 출석만 하거나 사실상 포기하는 사람들이 넘쳤다. 대부분은 비전공자들 이었는데.. 그 와중에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해서 포기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개념과 내용을 쉽게 설명을 해주기도 했었다.   이 당시에는 나는 코딩 구현력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성격도 지금보다 나서는 걸 즐겨하지 않아서.. PL(프로젝트 리더)같은 건 하지 않았다.  뭐 나름대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 했던 기간 같다.(실제로 대학 시절보다 조금 더 치열하게 공부 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안하고 게으르게 산 공부를 최고치로 퍼부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때 처럼 열심히 해야..할텐데.. 지금은 이때보다 많이 헤이해진건 사실이다... ㅠㅠ
이때 국비지원 동기 친구들은 한두달 뒤 몇몇 회사에 취업하기 시작했다.  나는 포트폴리오 와 이력서를 이리저리 지원하며.. 12월에 스카이 웨어 라는 회사와 일하게 되었다.

2017년

상반기

하지만 스카이 웨어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회상하고 본다면.. 어딘가 빈틈이 많은 녀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분명히 이 녀석이 개발 이라는 것을 할줄 알긴 하는 것 같은데.. 무언가 확신을 주지 못했다고나 할까?  이 때의 나는 매우 작은 우물 안에서 하늘만 바라 볼 수 있는 정도 였기 때문에.. 무엇이 부족하고 어떻게 이 우물을 나가야 할지 조차 몰랐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지금의 나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ㅋㅋㅋ)

 그렇게 이 회사와의 인연은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인턴종료로 끝났다. 3개월이 안된 다는 것을 기억하는건.. 두번의 인턴 기간이 6개월을 넘기지 못해.. 실업 급여를 받지 못해서 기억하고 있다. 12월 둘째주 쯤에 일을 시작해서 2월 말일에 인턴 기간이 종료 되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무언가 웹으로 만들긴 해야 겠고.. 그게 뭔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고.. 나는 부족하고.. 여러가지 정리정돈이 안된 내 방의 모습과도 같았다.. 현재의 내 방은 내가 작업할 수 있는 컴퓨터 책상 외에는 침대와 바닥에 옷이 널부러져 있고.. 이리저리 짐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2017년의 내 모습이 그러했다ㅋㅋ(재밌는건 내 방은 현재까지도 컴퓨터 책상을 제외하면 어지럽혀져 있다..ㅠㅠ 방치우기 너무 힘들어~) 그렇게 상반기가 지날때 쯤.. 일거리가 생기게 된다.  


하반기 

 나는 잠실에 위치한 작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현재도 다니지만.. 교회는 천호동 근처로 이전하였다.) 이 교회를 다니는 형님이 계시는 사역원의 홈페이지 리뉴얼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오퍼를 받게 되었다. 결과 적으로 이 리뉴얼은 취소가 되었지만.. 현재도 이 리뉴얼 소스코드.. 홈페이지는 근근히 내 개인 공부용 프로젝트로 코딩하고 있으며.. 현재는 오픈 소스로 진행 중이다. [소스보기](https://github.com/liante0904/bimProject)

 당시에는 이 일이 결정되어 실질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때는 17년 8월~ 9월 언저리 였다. 실제로 내 스스로 처음 밑바닥 부터 웹 서비스 하나를 만들어 가는 것에 어려움을 이때 처음으로 느끼게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내 스스로의 부족함을 가장 많이 느낀 시기도 이때 였다. 인턴이 종료 된 3월부터 여름인 7월 쯤 까지 휴식을 취하며.. 단 한번도 웹 개발을 손에 잡았던 적이 없었다.

내 2017년 상반기에는 배틀 그라운드라는 게임이 밤 낮 가리지 않고 있었으며.. 정말 백수처럼 신나게 놀았던 시기이다. 오히려 이렇게 신나게 놀고 다시 웹 개발을 하려 했을 때... 예전처럼 잘 할 수 있었다면.. 아마 나는 천재가 아니 었을까 생각한다 (-_-).. 즉 이때 느낀 위기감과 부족함이 어느 순간부터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못박게 된 계기가 된 샘이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 그나마 근근히 먹고 살 정도의 퍼포먼스를 내주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결국에는 이 프로젝트도 엎어지게 되고 나니.. 더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을이 되었을 때... 나는 예전 이력서를 가지고 취업전선에 다시 뛰어들게 된다. 이때 내가 꽤 많은 회사에 면접을 봤지만. 한 군데에서만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다른 한 곳은 여러가지 여건이 좋았지만 결국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실제 합격 되었던 신천역의 한 회사는.. 사내 솔루션이 너무 구식이기도 하고.. 나와 비전이 잘 맞지 않아서 고사하였다.(불합격 통보 받은 곳에 합격되길 기원하며.. 고사했었다 ㅠㅠ)

그 중에 TOP손해사정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웹 개발자로 면접을 보고.. 쪽지 시험 같은 것도 아주 잘봐서.. 크게 불합격될 사유가 없었던 회사가 하나 있었다.. 나까지 3명이 면접을 봤고.. 그 중 여자 한명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날 안뽑고 이 여자애를 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집으로 돌아 왔었다. 결과적으로 이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져 불합격을 하게 된다..

그 후 1달 뒤에 '전산직과 웹 개발을 겸하는 자리'에 같이 일 해볼 생각이 있냐는 연락을 이 탑손해사정이라는 회사에서 다시 받게 된다. 마침 일을 오래 쉬고 있던 터라.. 12월 부터 일을 이곳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때도 역시 인턴이었다.)


재밌는 것이.. 2017년의 첫 출근 회사인 '스카이 웨어' 와 '탑 손해사정'은 거의 일치 한다. (2017, 2018년 둘째 주 월요일) 그렇게 1년 정도의 텀을 두고 나는 두번의 IT관련 인턴을 지내게 된다. 


2018년

상반기 

탑손해사정에서의 회사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출근 첫날부터 양복을 입혀놓고 인사치레를 시켜댔고.. 그렇게 첫날부터 야근을해서 잊혀지지 않는 첫 출근 일 것이다. 여러 회사의 부류가 있는데.. 야근을 많이 하는 회사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착하다. 그리고 일이 고되다. 왜냐고? 대체적으로 한 성깔 하는 사람들은 이런 회사에 오래 붙어있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서 순응하고 살기 때문 이겠지..

이 회사는 단기간에 참 많은 일을 시켰고.. 나는 그 일들의 기한을 거의 놓치지 않고 처리 해주었다. 내 업무 밖이었던 웹 개발도 근근히 해주었고.. 결과적으로 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처리 했고.. 놓치지 않았지만.. 나보다 먼저 들어온 신입 개발자(나와 같이 면접을 봤던 여자 웹 개발자)와 약간의 트러블이 원인이었다.

트러블 이라 하기도 어려운 것이.. 설날을 전후로 회사가 이전 및 이사를 가게 되어서 일을 할 때 였는데.. 일을 도와주기는 커녕 시키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뭘 도와줄지 모르면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는거 아닌가? ' 라는 내 물음 한마디 때문 이었다. 

여러가지 수 많은 일 들이 있었지만.. 웹 개발자로 들어온 이 분은 실상 나보다 개발 구현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을.. 나와 같이 일하면서 나는 본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개발자가 '저 분 (글쓴이)이 너무 무서워서 같이 일을 못하겠다.' 라는 말을 하고.. 그 이야기가 부서장을 통해 파트장까지 흘러간 모양이었다. '인턴이 일을 잘해봤자 얼마나 잘할 것이냐' 라는 말과 함께 '우리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사유로 인턴계약 종료가 되었다.

하반기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하반기로 이어진다. 이 당시에는 무척 화도 많이 나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분명히 배울 점은 있었다. (어딜가서 일을 하면 분명히 한두가지 배울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네 사회에는 일을 잘 못해도 직장 생활을 이어 나갈 수 도 있다는 것과 적어도 나는 그런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그 외에도 몇가지 있지만 이 글에선 적지 않겠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운영 중인 웹 서비스는 주로 손해사정 보고서 내역 들이었으며.. 그 외에 인사 시스템.. 결제 시스템 등등이 혼합되어 있는 형태 였다. 모든 소스 코드를 보진 않았지만.. 주로 내가 사용하는 IT요청 사항 게시판 게시판은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라 생각된다.

온갖 하드 코딩이 난무 했으며.. 로직도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유지 보수를 손대기도 어렵게 전역적으로 css와 js를 한 곳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DOM을 조작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이제 갓 1년차도 안되는 내 경력에서 배울 점이 거의 없는 소스코드 였고... 고칠부분이 정말 많았지만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었다. (지금 잘 돌아가는데 만약 코드를 고치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유 였다.)

이 곳의 소스코드를 보면서 작년에 오퍼 받았던 사역원 리뉴얼 프로젝트가 생각났다. '어떤 식으로 구현해 나가고..  어떤 패턴으로는 만들면 안되겠다.' 라는 것이 분명하게 판가름 나기 시작했고.. 인턴이 종료된 대략 2주간 나는 시나


재미난 것은 이 일이 있는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이 일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웹 개발이 아닌 C기반의 어플리케이션 개발 환경에 적응하고 인수인계를 받는 과정에서.. '어떤 모습에서 나를 무섭게 느꼈는지' 애 관해 알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와 나는 딱하나 다른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파트장이나 부서장에서 '일을 인계해주는 부사수가 너무 무서워서 같이 일을 못하겠습니다. ' 라는 말을.. 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8년을 한달여 앞둔 이 시점에 2018년 사용기를 작성하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2018년은 정말로 많은 일들과 변화를 가져다준 한해로 기억 될것이다.

우선 나의 2018년은 무지무지 바빴을 것이다.. 연말이 가까워 질수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지내왔기에.. 올해에도 연말이 가까워져 어떤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이회사에서 나는 나름대로 많은 일들을 처리하며 중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것 같았다.

정말 많은 사연이있는 회사인데. 결론은 원하던 웹 개발자의 자리에서 일하진 않았다. 면접에서 떨어진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는 경험도 이회사에서 최초로 하지 않을까싶다.

웹 개발자가 아닌 전산 담당자업무도 그런대로 재미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단순 반복이 주류를 이루는업무이기에 이런 문제점의 근본을 해결하고 이 회사의 자체 웹 서비스의 문제점도 해결해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 회사는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는데 관심이 없는듯 보였고.. 근본을 해결하려는.. 나의 움직임을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로 취급했던것 같다.

결론은 이회사에서 짧지만 많은 업적들을 남겨놓고 퇴사하게 된다. 정확히는 인턴기간이 종료 되었다.


정확히 2월 28일 까지 근무를하고 3월부터 즐거운 뱃수 생활이 시작 되었다. 이 회사에 대한 이야기와 근무시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아직 작성되지 않은 2017년 히스토리에 작성될 예정이다. (개발 못하고 모르는 개발자와 개발자보다 개발 많이 아는 전산 담당자의 이야기가 될것이다 ㅎㅎ)




덧 붙여 사용할 글

[


다시 되돌아 가자면.. 원래도 연상이어서 많은 배려를 받으며 만났었고.. 내가 스타벅스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고 미래를 생각해야 할 시기였기에.. 더는 배려를 받으면서 그 사람을 만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배려를 더 받으면서 만날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너무나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서울 <-> 경기가 아닌 서울 <-> 지방 이어서.. 만나는 비용이나 시간이 너무 컸던게 이유라면 이유.

가장 미안

  지금도 그렇지만 이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확고하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것과 내가 더이상 스타벅스라는 곳에서 알바로 연연하며 인생을 살수 없었기에.. 그리고 프로그래머.. 개발자를 하기 위해 나쁘지 않은 직장을 그만두고 2년이나 다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문득 하게 되었다.

근근히 먹고 살수 있는 월급을 받으며 스타벅스 맨이 될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인생이 창창했고.. 내가 조금 더 흥미를 가지고 잘 할수 있는.. 그리고 미래가 있는 일은 프로그래머쪽이라는 판단을 했었다. 같은 일을 매일매일 반복하는 일은 지금도 그렇지만 매력 적이지 않다.

]



반응형

'내 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근의 근황..  (0) 2018.08.01
2017년의 회고 (부제 2개월 + 1일 지나고 적는 회고)  (0) 2018.03.01